값싼 구원, 값비싼 구원

요셉 목사
(한세대 신학대학원 졸업. 개척교회 목사)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을 보면, 영국의 왕자 에드워드는 우연히 왕궁을 찾아온 거지 아이 톰을 만난다. 둘은 외모가 너무나 꼭 닮아서 서로의 옷을 바꿔 입다가 왕자는 거지로 오해받아 경비병에 의해 쫓겨나고, 거지는 왕자로 생활하게 된다. 왕자는 빈민굴이든 어디에서든 왕자로서의 품위와 성품을 잃지 않고 살았고, 거지는 왕궁 생활을 적응하지 못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각자 제자리로 돌아간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에 만연해 있던 잘못된 신앙과 전통들을 교정시키려고 힘쓰셨다.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질문을 받으셨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좁은 문(구원의 문, 천국)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라는 충격적인 대답을 해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구원의 문)이 한 번 닫힌 후에, 밖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라고 애원을 해도 열리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신다(눅 13:25). 문 밖에 있는 자들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눅 13:25)는 외면까지 받게 된다. 그들은 충격과 당혹감 속에서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눅 13:26)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에 참여하며 신앙생활하였던 존재임을 항변한다. 신자였음을 부각시켜 보았지만, 기대와 달리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눅 13:27)는 준엄한 심판선언을 듣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 단순한 비유나, 엄포용이 아니었을까?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은 마음 속에 새겨 넣어야 한다. 다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러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원주이시지만, 또한 천국과 지옥으로 판결하시는 심판주로 다시 오시기 때문이다(마 25:31~46; 약 5:9~10).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의 법(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말씀을 믿으며 말씀대로 살았는지, 아닌지를 보신다. 좁은 문 밖에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한 편으로는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죄악의 삶(행악)을 즐기며 살았기 때문에 심판 받는 것이다.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양일까, 늑대일까? 좁은 문 밖에 있는 자들은 어떠한 죄를 짓고 살아가도, 교회만 다니면 구원을 쉽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어떻게 살든지 구원받는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이 있었고, 할례만 받으면 어떻게 살아도 구원받는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죄짓고 살아가도 쉽게 구원받는다’는 값싼 구원의 시작은 잘못된 성경 해석에서 비롯된다. 바리새인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눅 16:14)이었다. 이와 더불어 바리새인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성경 해석)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는 꾸짖음을 당하였다.

돈과 권력을 좋아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잘못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의 성경 해석(신학 이론)은 어떠한 결과를 낳는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은(바리새인, 서기관 등)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지옥)에 빠지리라”(마 15:14)고 말씀하셨다.

돈과 권력과 쾌락에 눈이 멀면, 누구든 말씀에 소경이 된다. 말씀을 읽어도 잘 깨닫지 못함으로 본래의 뜻과 어긋나게 해석하거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뜻과 탐욕을 채워주고 정당화시켜주는 소위, ‘은혜로운 말씀’만 보이고 들린다.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 등에는 그냥 지나치거나, 거부감을 느끼며 율법적이라고 매도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기록된 말씀이지만(딤후 3:16), 신학 이론은 계시된 게 아니다. 신학 이론은 성경 해석학이다. 한마디로 학문이라는 뜻이다. 성경말씀과 신학 이론을 동급으로 놓거나, 또는 신학 이론을 성경말씀보다 우위에 놓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어떻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피조물인 인간의 이론이 똑같은 권위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사람의 이론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지혜로울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신학 이론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이다.

덧붙여 유의할 점은, 인간이 만든 이론, 사상은 사람의 사고체계와 행동양식을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신학 이론은 교인들의 신앙체계와 행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올바른 성경 해석(신학 이론)은 참된 믿음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잘못된 성경 해석(신학 이론)은 믿음을 송두리째 파괴시킨다.

세속적인 탐심으로 성공, 부, 쾌락 등을 추구하거나 허용하는 번영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방종하게 만든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인간이 편집한 창작물이라는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를 무신론으로 물들인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W.C.C)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순결을 더럽힌다. 민중신학, 해방신학 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거짓 선동, 폭력혁명을 통한 구원을 제시한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신학 이론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가정 제도를 파괴한다. 각종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에 교주를 대신 앉혀놓고 인신 숭배를 하고 있다.

위에 열거한 인본주의적 신학 이론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의 기준에서 빗나간 것들이다. 기독교의 탈을 쓴 반 기독교적 사상이다. 그러한 종류의 신학을 만들고 신봉하는 것은 본인 자유겠지만, 문제는 심판대 앞에 섰을 때다.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어떠한 판결을 받겠는가?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느 계명이 큰지 질문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고 답하셨다.

하나님의 법(말씀)을 증언하고 완성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은 하나님의 법(말씀) 안에 담긴 두가지 중심축이다. 이 두 계명(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경외)하고, 부모공경하고 가족을 돌보며, 가난한 이웃을 돕는 삶을 살아야 한다.

유의할 점은, 외관상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물질을 더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의 돈과 물질로 부모봉양을 하지 않으면, 부모공경을 하는 게 아니다. 이 부분은 ‘고르반과 부모공경’ 칼럼에서 이미 언급했다.

한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는 방법을 예수님께 질문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언급하시며, 그 부자청년에게 계명들을 지킬 것을 요구하셨다. 부자청년이 다 지켰다고 하자 “네 소유(재산)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고 명령하셨다. 이웃에 사는 가난한 자들을 물질로 돕는 것이 이웃 사랑 계명을 실천하는 길인데, 부자청년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예수님을 떠났다.

가난한 이웃들을 도울 때, 내 재산 중 일부로 돕는 것이다. 남의 돈 모아서 가난한 사람 돕게 하고, 자신은 돕지 않고 외식(위선)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팎으로 종종 있다. 부자청년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보다 자신의 재산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가난한 이웃에게 좀처럼 나눠주지 않는다. 물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돕는 사람이 더 많다.

내 주위에 있는 가난한 이웃들을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3~4)는 말씀에 귀기울여야 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구제활동을 하면, 보여주기식 생색내기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가난한 척 하며 구제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진짜 구제가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못하는 경우가 적잖이 발생한다.

자신이 교회 일은 열심히 하지만, 돈, 권력, 쾌락 등을 추구하며 값싼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성품대로 살며, 값비싼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지 본인 스스로가 잘 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을 돌보며, 가난한 이웃을 돕고 살아갈 때, 참으로 복이 있다.